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부농 집안 출신으로, 프로이센군 하사관으로 복무한 부친[* [[위키백과]]에서는 부농이며 하사관 출신 아버지로 써있고, [[히브리대]] 전쟁사학과 마틴 판 크레펠트의 저서《전쟁 본능》에 따르면 아버지가 프로이센군 하사관 출신으로 확실한데 [[동독]] 시절 동독군의 빈약한 역사와 전통성을 만들기 위해 영웅 만들기로 빈농 혹은 프롤레타리아 출신으로 둔갑시켰다고 한다. 대장장이 출신으로 여러 곳에서 써있는 건 이 영향인 듯 함.]의 영향으로 군대에 투신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. 1777년 [[하노버 선제후국]]의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독일 내 군소국가들과의 전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.[* 이 시기 유럽의 장교들은 타국 군대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. 경우가 좀 다르지만 그의 제자였던 [[카를 폰 클라우제비츠]]도 [[러시아 제국]]에서 복무한 일이 있다. [[레프 톨스토이]]의 소설 <전쟁과 평화>에서, 다양한 국적을 가진 귀족 장교들이 러시아군 진영에서 회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.] 1801년에 프로이센에서 대령 직위와 귀족 대우를 제안하며 스카우트하여 그때부터 프로이센군에서 복무하게 된다. 1806년 나폴레옹군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나 풀려나, 1807년에 참모총장이 된다. 이때 [[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]]에게 육군개혁안을 제출하면서, 만약 이 개혁안을 받아들인다면 참모총장의 직위와 귀족 신분을 부여할 것을 요구하였고 둘 다 받아들여졌다.[* 이는 [[예나-아우어슈테트 전투]] 당시 참모 회의에서 본인의 목소리가 철저히 씹히고, 해당 전투는 결국 프로이센의 대참패로 끝났던 뼈아픈 경험 때문으로 추정된다.] '''[[장군참모|근대적인 참모본부 제도]]를 세계 최초로 창시하고''', 일반 시민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여하고 국민군대의 창설에 힘쓴 인물로서 사실상 근대적인 [[징병제]]의 시초를 닦은 사람 중 한 명이며, 후일 [[헬무트 폰 몰트케|대(大) 몰트케]]에 의해 발전된 [[임무형 전술]]의 시초를 닦은 사람이다. [[전격전]]이 소설이 된 현재 시점에서 [[제2차 세계 대전]] [[독일 국방군]] 전술전략철학인 [[기동전]]의 시조라 할 수 있는, 이래저래 전쟁사에 빠질 수 없는 업적을 쌓은 인물. 앙투안 앙리 조미니와 함께 포스트 나폴레옹 세대의 전략전술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한 인물.《[[전쟁론]]》을 집필한 [[카를 폰 클라우제비츠]]에게는 사관학교 시절 스승이었고, 이후 참모본부 창설을 비롯한 주요 군 개혁 정책에서도 클라우제비츠를 등용했다. 당연히《[[전쟁론]]》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, 실무상으로도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다. 1813년 [[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]]의 참모장으로 러시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던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|나폴레옹]]군을 추격하던 중 반격당해 전사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